“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것은 도전 정신과 민첩성을 갖췄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를 본받아 새롭게 도전해야 합니다.”

3일(현지 시간) 미국 캘리포니아 마운틴뷰에 위치한 만도의 실리콘밸리 사무소에는 정몽원 한라그룹 회장의 경영 철학이 담긴 액자가 걸려 있었다. 김병주 만도 실리콘밸리 사무소장은 “이곳은 미래자동차 시대를 대비해 회사의 혁신을 주도하는 전진 기지”라고 소개했다.

1969년부터 자동차 부품을 생산한 만도가 2017년 5월 첨단 기업이 모인 미국 실리콘밸리에 신기술 발굴과 스타트업 투자를 위한 사무소를 세우자 업계는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한국 자동차 부품사 중 실리콘밸리에 거점을 마련한 회사는 만도가 처음이다.

이미 독일의 콘티넨탈과 보쉬, 일본 덴소 등은 수년 전부터 실리콘밸리에 대규모 연구개발(R&D) 센터를 짓고 현지 스타트업 발굴·투자에 나섰다. 한국 기업 중에는 만도에 이어 현대모비스가 지난해 11월 신기술 발굴을 위해 이곳에 현지 사무소 ‘모비스 벤처스’를 출범했다.

올해 7월 영국에서 열린 ‘2019 포뮬러 스튜던트’ 행사에서 현지 대학생들이 소형 레이싱카에 벨로다인의 라이다(자율주행차 센서)를 장착하고 있다. 현대모비스는 미국 실리콘밸리에 위치한 벨로다인에 올해 10월 약 585억 원을 투자했다. 벨로다인 제공

만도는 자율주행과 전동화 등 미래차 분야 신기술을 자체 R&D만으로 확보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전 세계에서 기술 경쟁이 가장 치열한 실리콘밸리에서 기존 자동차업계는 물론 정보기술(IT) 분야 스타트업과 협업해야 미래차 시대에 대비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김 소장은 “미래차 신기술을 가진 스타트업 쪽에 만도 명함을 내미는데 창업가들이 시큰둥하게 반응하는 것을 보고 ‘실리콘밸리에서는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구나’를 느꼈다. 새로 배운다는 태도로 접근하자 서서히 성과가 났다”고 말했다. 정 회장도 실리콘밸리 사무소 직원들에게 ‘구글은 어떻게 일하는가’ 등 조직문화·업무혁신 관련 서적을 직접 전달해주면서 사기를 북돋았다고 한다.

만도는 실리콘밸리 사무소를 연결 고리로 미국 신생 전기차 업체 6, 7곳과 기술 협력부터 대규모 물량 수주 등 크고 작은 협업을 진행하고 있다. 최근 현지 전기차 스타트업과 기계 연결 없이도 전기 신호만으로 차량 운전대를 제어할 수 있는 신개념 시스템을 공급하는 계약도 체결했다.

차동준 부소장은 “신생 전기차 업체들은 새로운 시스템, 부품을 차량에 적용하고 싶어 하는데 독일, 일본 부품사들이 망설일 때 만도가 ‘우리가 한 번 해보겠다’고 해 혁신적인 결과물을 낼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미국 실리콘밸리 지역에 본사를 둔 스타트업 팬텀AI의 이찬규 대표가 카메라 센서를 장착한 차량으로 자율주행 기술을 실험하고 있다. 팬텀AI 제공

한국 스타트업에도 실리콘밸리는 새로운 기회의 땅이다. 현대자동차 연구원 출신인 이찬규 대표와 테슬라 개발자 출신 조형기 대표가 공동 창업한 팬텀AI가 대표적이다. 차량의 눈 역할을 하는 카메라 센서를 개발하는 팬텀AI는 실리콘밸리의 유일한 한국계 자동차 분야 스타트업이다.

4일 캘리포니아 벌링게임 본사에서 만난 이찬규 대표는 “자율주행차의 눈 역할을 하는 카메라 센서 시장은 이스라엘 업체가 점유율 95%를 차지해 가격 상승 등의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면서 “팬텀AI는 내년까지 성능 면에서는 비슷하면서도 더 저렴한 양산 제품을 통해 경쟁력을 확보할 것”이라고 했다. 실제 팬텀AI는 미국 완성차 업체 2곳, 독일 부품사 2곳과 각각 공급계약을 논의하고 있다.

이 대표는 “팬텀AI는 어떤 업체와도 협업하고 일하겠다는 생각으로 실리콘밸리에 터를 잡은 것”이라며 “기존 자동차업계 생태계를 벗어나 새로운 도전을 꿈꾸는 창업가들이 이곳에서 더 많은 기회를 잡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마운틴뷰·벌링게임=지민구 기자 waru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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